양육효과는 과장된 상식 — 부모 역할에 대한 비판
사람들은 흔히 부모의 양육 태도와 방식이 아이의 성격과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부모가 다정하고 올바르게 가르치면 아이가
바른 성품을 갖고 성장하며, 반대로 무관심하거나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문제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다.
하지만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이러한 믿음이 ‘양육가설’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신화라고 말한다. 그녀는 부모의 영향력이 아이의 성격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게 부풀려졌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수십 년간의 심리학 연구와 통계 자료를 분석하며, 동일한 가정에서 자란 형제자매조차 성격과 행동 양식이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같은 부모 아래서 같은 규율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는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반면 다른 아이는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차이를 단순히 양육 방식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양육가설을 뒤흔드는 핵심 논거 중 하나는, 입양아나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다.
유전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형제자매가 같은 집에서 성장해도 성격의 유사성이 거의 없다는 점, 반면에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일란성쌍둥이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성격을 보인다는 점은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해리스는 부모의
양육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영향은 생각보다 제한적이며, 성격 형성과 사회적 행동의 핵심
동인은 부모가 아닌 다른 요인에 있다는 것이다. 즉, 부모는 아이의 삶에 중요한 존재이지만, 아이의 성격을 빚어내는 ‘조각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가정환경보다 또래집단의 중요성 — 집단사회화 이론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아이의 성격과 행동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정환경보다 또래집단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를 ‘집단사회화 이론’이라 부른다. 아이는 단순히 부모로부터 가치관과 행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또래집단 속에서 규범을 익히고 사회적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이는 먼저 자신을 ‘우리’와 ‘그들’로 구분하는 범주화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범주, 즉 또래집단의 특징과 규범을 내면화하기 위해 동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친구들의 말투, 행동, 취향, 심지어 가치관까지 모방하게 된다. 집단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집단의 규칙을 따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게 된다. 해리스는 이러한 집단사회화 과정이 아이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부모의 지시와 가르침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는 통할 수 있지만, 아이가 학교나 놀이터에서 만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또래집단의 규칙이 우선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무리 예의를 강조해도 또래집단에서 공격적 행동이 인정받는 분위기라면, 아이는 그 분위기에 맞춰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영향력은 특히 유년기 중반 이후에 뚜렷해진다. 초등학교 시기부터 아이는 가정보다 학교, 학원, 놀이 모임 등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이 과정에서 또래집단의 가치와 행동양식이 강하게 각인된다. 해리스는 이 시점부터 형성된 성격이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집단사회화 이론은 아이를 이해하려면 가정 내부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적 집단과 문화적 환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부모의 사랑과 지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또래문화가 성격의 방향을 결정짓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유전과 또래의 조합 — 성격 형성의 실제 구조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성격 형성을 설명할 때, 유전과 환경이 서로 맞물려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흔히 알려진 ‘성격의 50%는 유전, 나머지 50%는 환경’이라는 결론을 인정하면서도, 여기서 말하는 환경의 주체가 부모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환경
요인의 대부분은 아이가 속한 또래집단, 학교 문화, 지역 사회, 미디어와 같은 외부 세계에서 온다고 본다. 유전적 요인은 기질과
기본적인 성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타고난 외향성, 내향성, 감정적 민감성, 모험심 등은 부모가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성격의 씨앗이다. 하지만 이 씨앗이 어떻게 자라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는 환경, 특히 또래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같은 유전적 기질을 가진 아이라도, 속한 집단의 규범과 가치에 따라 전혀 다른 행동양식을 보일 수 있다. 해리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란성 쌍둥이 연구를 자주 인용한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쌍둥이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더라도 성격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지만, 그 표현 방식은 각자의 또래집단과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유전이 뼈대를 제공하고, 환경이 그 뼈대를 어떻게 채울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환경 요인 중에서도 또래의 영향력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아이가
사회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역할을 설정하는지를 좌우한다. 부모가 만든 가정환경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실제로 아이가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은 가정 밖이다. 학교에서 친구와 어울리며, 놀이에서 경쟁하고 협동하는 경험이 성격의 세부를 결정짓는다. 결국 성격은 유전이라는 출발점과, 또래집단이라는 성장 경로가 만나서 만들어진다. 유전은 변하지 않지만, 환경은 변할 수 있다. 해리스는 이를 부모에게 주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전한다. 비록 아이의 기질은 부모가 바꿀 수 없지만, 어떤 또래집단과 환경에 노출될지를 선택하거나 조율함으로써 긍정적인 성격 발달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