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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모른다에서 피어나는 진짜 대화 – 공감과 하나됨의 길

by 토마의 사람이야기 202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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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 경청, 현재, 그리고 영의 소통에 대하여 ―

1장 대화의 시작 – 모른다는 전제와 진정한 경청

대화의 시작은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모르고 있다, 다 알 수 없다.”
이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진짜 대화가 가능합니다.

대화란 잘 듣는 것, 즉 있는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는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듣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듣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됩니다.

“저 사람은 지금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거야.”
“저 표정은 비웃음이야.”
“저건 나를 공격하는 말이겠지.”
이렇게 ‘의미 부여’를 덧씌운 순간, 상대의 말은 있는 그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가진 경험, 관계의 역사, 과거의 기억을 기준으로 상대를 규정하고 듣습니다.
어제의 그 사람, 1년 전의 그 사람, 그때 했던 말과 행동이 지금의 판단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만나기보다, ‘내가 만들어놓은 그 사람’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전제를 가지고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새롭게 들립니다. 그제야 ‘있는 그대로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내가 의미 부여한 이미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너와 나, 서로가 존중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진정한 공감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모른다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안다’는 확신 속에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무너질 때, 비로소 진짜 앎이 열립니다.”

이 지점에서 욥의 고백이 보여주는 깨달음으로 넘어가 봅시다.

2장 모른다의 인정과 욥의 고백

욥기는 ‘모른다’의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욥은 오랜 변론 끝에 하나님께 질문을 받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바다의 샘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이 끝없는 질문 앞에서 욥은 말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그리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감하는 것이 진짜 앎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하나님은 이런 성품을 가졌어.” 이런 말들은 결국 부분적 인식일 뿐입니다.
그것을 절대화할 때, 그게 바로 ‘우상’이 됩니다.

진짜 ‘안다’는 것은 “정말 모르는구나”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심지어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그 앎조차 헛된 그림자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아의 붕괴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붕괴는 절망이 아니라, 진짜 나를 세우는 시작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은 오래된 자아가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 무너짐은 끝이 아니라, 진짜 나를 세우는 시작입니다.”

이 무너짐의 끝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3장 현재에 발딛고 사는 삶과 진정한 공감

“나는 몰라.” 이 단순한 문장이 우리를 현재로 데려옵니다.

모르면 묻고, 모르면 기다리고, 모르면 그냥 살아봅니다.
지금 커피를 마시며, 설거지를 하며, 지금 한 걸음을 딛는 것 — 그것이 전부입니다.

‘모른다’를 인정하면, 현재가 전부임을 알게 됩니다.
그 전부가 아닌 다른 곳을 찾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시 불안해지고, 떠다니고, 염려하게 됩니다.

“나 몰라. 지금 이 순간만 내가 할 수 있어.” 이 말이 곧 평안의 시작입니다.

현재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만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사는 사람은 항상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으로 존재하죠.
그래서 현재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공감이 가능한 영의 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진짜 공감이란 현재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와 너의 경계는 부드럽게 녹습니다.

4장 모른다에서 피어나는 하나됨과 영의 소통

우리는 대상을 두고 하나 되려 하지만, 그렇게는 진짜 하나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맞추려는 노력, 즉 ‘눈으로 본 인식’을 기준으로 한 타협이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조화로워 보이지만, 진정한 한 덩어리가 되지 못합니다.

진짜 하나됨은 “모른다”에서 시작됩니다.
“나도 모른다, 너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만날 때, 존중이 생기고 인식의 차이가 허락됩니다.

“너는 너의 경험대로 보고, 나는 나의 인식대로 본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진정한 존중이며, 그때 비로소 너와 나는 서로의 독립된 존재로서 한 덩어리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공감이며 소통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만남은 단순한 관계의 평화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열리고, 보이지 않던 차원의 소통 — 영의 차원 — 으로 확장되는 문이 됩니다.

내 인식으로만 살면 한 길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모른다는 자리에서는 다양한 길, 창조적인 길, 새로운 빛이 열립니다.
그것은 내 힘이 아닌, 다른 시각, 영의 시야로부터 오는 앎입니다.

이 앎은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 재질이 다릅니다.

그 영의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하나가 됩니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대화, 공감, 그리고 하나됨의 완성입니다.

💬 “모른다”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깨어남이다.
내가 알고 있다는 착각이 무너질 때, 진짜 앎이 시작되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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